무라카미 하루키 초기 걸작인 <1973년의 핀볼>은 사라진 기계 스페이스 십을 추적하며 시대적 허무와 고립을 그려내요. 70년대 일본 청년들이 겪은 목적 상실과 그로 인한 집착의 본질을 세밀하게 파헤치는 이 소설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정서적 공명을 불러일으켜요.

스페이스 십을 향한 고독한 순례와 상실의 흔적
주인공이 집착에 가깝게 찾아 헤매는 핀볼 기계 스페이스 십은 단순히 지나간 시절의 오락 기구가 아니에요. 그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특정 시간대의 상징이자 이미 잃어버린 자아의 파편을 의미해요. 핀볼은 한번 튕겨 나간 공이 결국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겪는 생의 하강 곡선과 닮아 있어요. 주인공이 차가운 창고 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기계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재회의 기쁨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확인에 가까워요.
1970년대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기 이후 전공투 운동의 실패와 함께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기에요. 청년들은 갈 곳 잃은 에너지를 무의미한 유희나 개인적인 고립으로 돌렸는데 핀볼 게임이 바로 그 도피처가 된 거예요. 기계의 플리퍼를 조작하며 공을 유지하려는 행위는 무너져가는 일상을 붙들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혀요. 하지만 결국 공은 구멍으로 사라지고 게임은 종료되며 남는 것은 기계적인 점수판의 숫자뿐이에요.
저는 이 작품을 보며 현대인들이 스마트폰 화면 속 무의미한 스크롤에 집착하는 모습이 70년대의 핀볼 게임과 궤를 같이 한다고 느껴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지만 그 끝에 실질적인 수확이 없다는 점이 지독한 허무를 자아내요. 주인공의 여정은 결과적으로 기계를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인지하기 위한 과정인 거예요. 상실을 직면하는 것만이 고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돼요.
- 한정된 공간 안에서 반복되는 공의 움직임
- 현실 세계와 단절된 오락실이라는 폐쇄적 공간
-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세 개의 플리퍼
- 기계음과 불빛 뒤에 숨겨진 정적
쌍둥이 자매 208과 209가 제공하는 기묘한 안식
주인공의 아파트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름 없는 쌍둥이 자매 208과 209는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이에요. 이들은 주인공의 고독한 일상에 침입했지만 오히려 그 고립을 완성하고 안락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존재들이에요. 타인과의 깊은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주인공에게 번호로 불리는 이들은 어떠한 정서적 요구도 하지 않는 무해한 동반자가 되어줘요. 자매의 존재는 주인공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심리적 방어기제처럼 보이기도 해요.
쌍둥이는 주인공의 옷을 입고 그가 제공하는 공간에서 먹고 자며 일종의 가상 가족 형태를 유지해요. 이들의 소통 방식은 논리적이지 않고 지극히 감각적이며 횡설수설에 가깝지만 주인공은 여기에서 기묘한 평온을 얻어요. 현실의 타인은 끊임없이 정체성을 묻고 책임을 요구하지만 208과 209는 존재 자체로 그저 옆에 머물 뿐이에요. 이것은 소외된 개인이 타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온기이자 최대한의 거리를 상징해요.
결국 이들이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주인공은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의 고독으로 복귀하는 의식이에요. 안식처는 영원할 수 없으며 인간은 결국 자신의 구멍 난 마음을 스스로 메워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해요. 자매와 함께했던 시간은 진공 상태의 평화였고 그 진공이 깨지는 순간 비로소 진짜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해요. 주인공에게 이들은 상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준 마취제 같은 역할이었던 거예요.
- 개별적인 이름 대신 부여된 익명의 번호
- 주인공의 세계를 공유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태도
-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기묘한 분위기
- 갑작스러운 등장만큼이나 예고 없는 이별
핀볼 게임의 무의미함이 갖는 현대적 미학
핀볼 기계 앞에 서서 보낸 무수한 시간은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면 철저히 낭비된 시간이에요. 그러나 하루키는 이 무의미함 속에서 삶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해내요. 아무런 보상도 없는 게임에 몰두하는 행위는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대에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저항 방식이기도 해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공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은 생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현대인의 자화상과 연결돼요.
70년대 일본의 정서는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디지털 소외감과 매우 닮아 있어요. 기술은 발전하고 연결은 과잉되었지만 개인의 내면은 오히려 더 텅 비어가는 현상이 반복되는 거예요. 핀볼 게임에서 느끼는 손끝의 진동과 기계적인 마찰음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성취감을 제공하지만 기계 전원을 끄는 순간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져요. 이러한 허무의 미학은 우리가 왜 그토록 쓸모없는 취미나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요.
우리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그것이 내 존재의 빈틈을 채워줄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에요. 스페이스 십을 찾는 주인공처럼 우리도 각자의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계의 행방이 아니라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민낯이에요. 무의미한 행위에 몰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가 핀볼 게임을 통해 배워야 할 지점이에요. 집착은 상실을 메우려는 시도가 아니라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일환인 거예요.
-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유희적 태도
- 사회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개인적 몰입
- 기계와의 교감을 통한 자아 탐구
- 반복되는 실패를 받아들이는 회복 탄력성

쥐와 제이의 바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정서
소설의 또 다른 축인 쥐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도시적 삶과 대비되는 더 깊은 고립을 보여줘요. 제이의 바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쥐의 모습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세대의 쓸쓸한 뒷모습을 대변해요. 그들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막상 그것이 손에 들어오면 금세 흥미를 잃거나 스스로 파괴해버리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줘요. 이것은 성장이 멈춘 시대에 청춘들이 느끼는 원초적인 불안함에서 기인한 거예요.
주인공이 핀볼 기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동적인 탐색이라면 쥐가 바에 머무는 것은 정적인 침전이에요. 두 인물은 결국 같은 상실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만 다를 뿐이에요. 한 명은 과거의 물리적 실체를 찾아 나서고 다른 한 명은 내면의 침묵 속으로 더 깊이 침잠해요. 하루키는 이들을 통해 인간이 고독을 마주하는 두 가지 전형적인 방식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정서는 현대 사회에서 일명 히키코모리나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는 이들의 심리와 맞닿아 있어요.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하고 성과를 요구하지만 개인은 그 속도에 발맞추기보다 자신만의 작은 방이나 단골 술집으로 숨어들기를 선택해요. 그 안에서 느끼는 짧은 안도감이 현실의 거친 파도를 견디게 하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에요. 1973년의 청춘들이 느꼈던 그 막막함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는 거예요.
- 변화를 거부하고 정체된 삶을 선택하는 인물
- 유일한 소통 창구로서의 제이의 바
-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반복되는 음주와 흡연
- 사회적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연대감
상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집착의 끝
소설의 끝에서 핀볼 기계와의 만남은 대단한 감동이나 반전을 선사하지 않아요. 오히려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상실의 본질이에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아도 예전의 그 모습일 수 없으며 이미 우리 내부에서 변질되었거나 소멸했음을 인정해야 해요. 집착은 그 불가능한 복원을 꿈꾸는 헛된 희망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기도 해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계와 데이터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며 살아가요. SNS의 좋아요 숫자에 일희일비하거나 유행하는 브랜드에 열광하는 모습은 70년대의 핀볼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 모든 행위의 저변에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이 깔려 있어요. 하지만 소설이 보여주듯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되어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해요.
<1973년의 핀볼>은 상실을 극복하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대신 상실을 품고 고독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법을 넌지시 알려줄 뿐이에요. 우리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찾는 행위를 통해 내가 아직 길 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인 거예요. 이제 여러분도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자신만의 핀볼 기계를 한번 떠올려보세요. 그것이 비록 낡고 고장 난 기계일지라도 그것을 추억하는 행위만으로도 삶은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이 될 거예요.
- 상실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 집착의 끝에서 마주하는 허탈함의 미학
- 고독을 피하는 것이 아닌 깊이 응시하는 법
-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과거와의 담백한 작별
지금 여러분이 놓지 못하고 있는 그 집착의 대상은 무엇인가요. 때로는 그 집착을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자신을 찾는 첫걸음이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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